세이코 크레도르 에이치 II - 일본 미니멀리즘이 만든 5천만원대 걸작


도자기 다이얼 20개가 19개 깨지는 이유


크레도르 에이치 II의 도자기 다이얼 제작 과정을 처음 봤을 때 충격적이었던 건 성공률이에요. 노리타케 도자기 공예 기법으로 만드는 이 다이얼은 20개를 만들면 19개가 깨져요. 1,100도 가마에서 여러 번 구워내는 과정에서 미세한 균열이라도 생기면 전부 폐기하거든요. 12개의 인덱스와 'Credor' 로고는 장인이 붓으로 한 획씩 그려 넣는데, 시간당 다이얼 하나 정도밖에 완성하지 못해요.


이 시계의 현재 시세는 GBLT999 플래티넘 모델 기준 약 53,000달러(약 6,900만원), 로즈골드 GBLT998은 41,000달러(약 5,300만원) 정도예요. 연간 20개만 생산되는 희소성 때문에 중고 시장에서도 프리미엄이 붙어요. 레퍼런스별로 가격차가 있는데, 2021년 출시된 블루 다이얼 GBLT997은 59,000유로(약 8,000만원)로 더 비싸요.


필립 뒤푸르가 세이코에 가르쳐준 것


스프링 드라이브 칼리버 7R14의 브리지를 자세히 보면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있어요. 베벨링(anglage)이라고 불리는 모서리 다듬기 기법인데, 이게 보통이 아니에요. 스위스 독립시계제작자의 전설 필립 뒤푸르가 직접 마이크로 아티스트 스튜디오에서 컨설팅했거든요. 겐티앙 나무(gentian wood)를 사용해서 수작업으로 다듬는 기법은 뒤푸르의 심플리시티와 동일한 방식이에요.


무브먼트 브리지의 곡선은 식물 줄기를, 컷아웃은 꽃잎을 형상화했어요. 벨플라워(도라지꽃)는 시오지리 지역의 상징이자 마이크로 아티스트 스튜디오의 로고예요. 브리지 표면의 헤어라인 마감과 폴리싱된 베벨 엣지가 만드는 명암 대비는 일본 전통 미학의 '음양의 조화'를 표현한 거예요. 파워리저브 표시를 무브먼트 뒷면으로 옮긴 것도 다이얼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어요.


스위스 브랜드가 절대 못 만드는 이유


크레도르 에이치 II와 스위스 미니멀 시계의 결정적 차이는 '절제의 철학'에 있어요.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의 드레스 워치들은 미니멀하더라도 브랜드 로고, 제네바 씰, 복잡한 기요셰 패턴 같은 요소를 포기하지 못해요. 반면 에이치 II는 시간 표시 외에는 모든 걸 배제했어요.


더 흥미로운 건 제작 방식이에요. 스위스 최고급 브랜드들도 다이얼은 외주 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크레도르는 마이크로 아티스트 스튜디오에서 100% 인하우스로 만들어요. 나가노현 시오지리의 세이코 엡손 공장 안에 있는 이 스튜디오는 연간 25개 시계만 생산해요. 그중 20개가 에이치 II예요. 나머지 5개는 미닛 리피터나 소네리 같은 차임 워치들이고요.


투자 가치보다 중요한 착용감


39mm 플래티넘 케이스는 묵직하지만 10.3mm 두께로 얇아서 셔츠 커프스에 걸리지 않아요. 자라츠 폴리싱(Zaratsu polishing)으로 마감한 케이스는 거울처럼 반사되는데, 미세한 스크래치도 바로 보여서 관리가 까다로워요. 그래도 플래티넘 특유의 광택은 화이트 골드와는 차원이 달라요.


스프링 드라이브의 장점은 초침이 스윕하듯 움직인다는 거예요. 기계식인데 쿼츠처럼 정확해서 월차 ±15초 정도예요. 60시간 파워리저브도 실용적이고요. 다만 AS 센터가 일본에만 있어서 서비스 받으려면 3-4개월은 기다려야 해요. 정품 인증서와 박스는 필수예요. 크레도르는 병행 수입이 거의 없지만, 중고 거래 시 출처가 불분명하면 가치가 확 떨어져요.


마니아들만 아는 디테일


2020년 와코 긴자 한정판 GZLT999는 12시와 6시 인덱스가 로마 숫자예요. 일반 모델과 차별화한 건데, 30개만 생산돼서 현재 찾기 어려워요. 2018년 로즈골드 모델은 악어가죽 스트랩이 기본인데, 플래티넘 모델보다 1만 달러 정도 저렴해요.


2025년 현재 크레도르는 로코모티브 컬렉션으로 글로벌 진출을 시도하고 있어요. 제럴드 젠타가 디자인한 육각형 베젤의 GCCR997은 12,500달러(약 1,600만원)로 에이치 II보다 접근성이 좋아요. 티타늄 케이스에 자동 무브먼트라서 일상 착용에도 부담이 없고요.


크레도르 에이치 II는 단순한 고급 시계가 아니라 일본 장인정신의 결정체예요. 스위스 시계가 전통과 혁신의 조화를 추구한다면, 크레도르는 '본질의 아름다움'에 집중해요. 5천만원대 가격이 부담스럽다면 골드페더 컬렉션(약 3,000만원대)도 좋은 선택이에요. 투자 목적보다는 진짜 시계를 이해하는 컬렉터에게 어울리는 작품이에요.


Disclaimer: 본 글은 특정 브랜드나 업체로부터 대가를 받지 않고 작성된 정보성 콘텐츠입니다. 시계의 가격·가치·특징 등은 시장 상황과 출시 시점, 개인의 사용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참고용이며, 실제 구매·사용·보관 등 모든 결정은 독자 본인의 책임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롤렉스 요트마스터 - 레가타 타이머가 바꾼 요트 레이싱의 시간